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단순한 지역 갈등이 아니었다. 전 세계 공급망의 숨겨진 취약점을 한순간에 드러낸 '글로벌 스트레스 테스트'였다. 2022년 2월 전쟁이 시작되자 유럽 천연가스 가격이 1000% 폭등했고, 우크라이나산 밀 공급 중단으로 아프리카에서 식량 위기가 터졌다. 팔라듐, 니켈 같은 핵심 금속 가격도 급등하면서 자동차부터 반도체까지 모든 산업이 타격을 받았다. 2025년 종전이 확실해지면서 이제 투자자들의 관심은 "복구"가 아니라 "재설계"로 옮겨가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과 러우 전쟁을 거치며 기업들은 깨달았다. '싸고 빠른' 공급망은 위기에 취약하다는 것을. 이제는 '안정적이고 다변화된' 공급망이 새로운 경쟁력이다.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신흥 제조 거점으로 부상하다
전쟁이 끝나면서 동유럽이 '유럽의 새로운 공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EU는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해 2024-2030년 기간 중 총 5000억 유로(약 740조 원)를 투입하기로 했다. 하지만 진짜 변화는 재건이 아니라 '니어쇼어링(nearshoring)'이다.
폴란드가 대표적 사례다. 2024년 폴란드로 유입된 외국인 직접투자(FDI)가 280억 달러를 기록했는데, 이는 전년 대비 85% 증가한 수치다. 특히 독일 기업들이 중국에 있던 생산라인을 폴란드로 옮기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폭스바겐은 EV 배터리 공장을, BMW는 전기차 부품 공장을 폴란드에 건설 중이다.
체코도 마찬가지다. 2024년 체코 제조업 생산이 전년 대비 12% 증가했는데, 이는 EU 평균(4.2%)을 크게 웃도는 수치다. 보쉬, 지멘스, ABB 같은 독일 산업 기업들이 앞다퉈 체코에 스마트 팩토리를 짓고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중국까지 가서 만들 필요 없이 집 앞에서 만들 수 있다면 그게 낫다는 판단이다.
루마니아는 IT 서비스업 허브로 성장하고 있다. 부쿠레스트에는 마이크로소프트, 오라클, IBM의 유럽 개발센터가 들어섰고, 2024년 루마니아 IT 수출액이 80억 달러를 돌파했다. 이는 5년 전의 3배 수준이다.
헝가리는 반도체 조립 기지로 자리 잡고 있다. 삼성SDI가 헝가리 괴드에 배터리 공장을 짓고, SK하이닉스도 반도체 패키징 공장을 건설 예정이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반도체 공급망이 이동하는 상징적 사건들이다.
에너지 구조 전환: 재생에너지와 원전, 새 중심축이 생긴다
러시아 에너지 의존에서 벗어나려는 유럽의 움직임이 에너지 산업 지형을 완전히 바꿔놓고 있다. 2022년 러시아산 천연가스가 EU 전체 가스 수입의 40%를 차지했지만, 2024년에는 8%까지 떨어졌다. 그 자리를 재생에너지와 원전이 메우고 있다.
독일의 변화가 가장 극적이다. 2024년 독일의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59.7%를 기록했다. 이는 2022년 46.3%에서 13.4포인트 급증한 것이다. 특히 해상 풍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2024년 독일 해상 풍력 신규 설치 용량이 2.9GW에 달했고, 2030년까지 30GW로 늘릴 계획이다.
원전도 부활하고 있다. 프랑스는 2024년 신형 원전 6기 건설을 확정했고, 네덜란드는 40년 만에 신규 원전 건설을 결정했다. 특히 주목할 건 소형모듈원자로(SMR) 투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롤스로이스가 개발하는 SMR에 영국 정부가 2억 1500만 파운드를 투자했고, 웨스팅하우스의 SMR도 폴란드와 체코에서 도입을 검토 중이다.
에너지 저장장치(ESS) 시장도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2024년 유럽 ESS 시장 규모가 180억 달러를 기록했는데, 이는 2022년의 3배 수준이다. 테슬라, BYD, 카이톡스 같은 기업들이 대용량 배터리 설치 경쟁을 벌이고 있다.
수소 경제도 본격 궤도에 올랐다. 독일이 2024년 수소 인프라에 96억 유로를 투자했고, 네덜란드는 유럽 최대 수소 허브 구축을 선언했다. 2030년까지 유럽에 1000만 톤 규모의 청정 수소 생산 능력을 갖추겠다는 목표다.
글로벌 공급망 재설계: 다극화에서 다변화로
전쟁과 팬데믹을 거치며 기업들의 공급망 전략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중국 올인' 전략에서 '글로벌 분산' 전략으로 전환하고 있는 거다. 맥킨지 조사에 따르면 글로벌 기업의 87%가 공급망 다변화를 추진 중이고, 이 중 64%가 실제로 생산 거점을 분산시켰다.
베트남이 가장 큰 수혜국이다. 2024년 베트남 FDI 유입액이 368억 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애플의 아이폰 조립, 삼성의 갤럭시 생산, 나이키의 신발 제조가 모두 베트남으로 이전했다. 베트남 제조업 PMI가 52.2를 유지하며 견조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인도도 급부상하고 있다. 애플이 2024년 인도에서 생산한 아이폰 비중이 12%에 달했고, 2027년까지 25%로 늘릴 계획이다. 인도 정부의 PLI(생산연계인센티브)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면서 글로벌 제조업체들의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다.
멕시코는 '니어쇼어링'의 최대 수혜국이다. 미국 기업들이 중국 대신 멕시코에 공장을 짓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2024년 멕시코 제조업 투자가 250억 달러를 기록했는데, 이는 전년 대비 45% 증가한 수치다. 테슬라, 포드, GM이 모두 멕시코에 EV 공장을 짓거나 확장 중이다.
아프리카도 주목받고 있다. 특히 모로코와 에티오피아가 섬유, 자동차 부품 생산 거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BMW가 모로코에, 폭스바겐이 남아공에 생산 라인을 증설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젊은 인구(평균 연령 19.7세)와 저렴한 인건비가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물류 인프라도 함께 성장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창이 공항이 2024년 화물 처리량에서 홍콩을 제치고 아시아 1위를 기록했다. 두바이 항만공사가 아프리카와 남미에 신규 항만을 건설하고 있고, 마스크는 동남아시아 물류 네트워크를 대폭 확충했다.
결론
러우 전쟁 종전이 글로벌 공급망에 미치는 영향은 복구가 아니라 재편이다. 동유럽의 제조업 부상, 에너지 전환 가속화, 공급망 다변화는 모두 향후 10년간 지속될 메가트렌드다.
투자자들은 이제 단기적 전쟁 특수가 아니라 장기적 구조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폴란드 제조업, 독일 재생에너지, 베트남 수출 기업, 인도 IT 서비스 등이 새로운 투자 기회가 될 수 있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이 촉발한 변화는 이제 시작이다.